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평 윤씨 (문단 편집) === 윤취동 파 === 한편 이들과는 촌수거리가 좀 먼, 윤두수의 차남 도제공(都制公) 윤흔의 6대손인 [[윤취동]](1798. 7. 18. ~ 1863. 12. 21.)이란 인물이 있었다. 말이 양반 가문이지 그의 아버지 [[윤득실]] 대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 직접 나뭇짐을 지고 농삿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. 그럼에도 인품이 후하고 성실했던 윤취동은 고향인 [[천안시|천안]]에서 [[아산시|아산]]으로 온 뒤 열심히 농토를 개간해 결국 아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.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본인은 중추부지사가 되었을 뿐더러, 모은 재산으로 교육시킨 두 아들 [[윤웅렬]]과 [[윤영렬]]은 각각 [[대한제국]] 군부대신(지금의 [[국방장관]])과 자헌대부로 출세하기에 이른다. 그리고 윤웅렬과 윤영렬은 자식을 매우 많이 두었고, 윤취동이 모은 재산과 남다른 교육열로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 유력인사가 되었다. 윤취동의 주요 자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. * 장남 [[윤웅렬|웅렬]](1840. 5. 18. ~ 1911. 9. 22.): 해당 문서 참고. [[대한제국]] 군부대신. [[경술국치]] 이후 [[조선귀족]]으로 [[남작]] 작위를 받아 [[친일반민족행위자]]가 되고 1년 만에 죽었다(…).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 총 5남 2녀를 두었는데, 윤치호는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 소생이고 윤치왕·윤치창은 측실 김정순 소생이라 나이차이가 꽤 크다. * 장남 [[윤치호|치호]](1865. 1. 23. ~ 1945. 12. 9.): 해당 문서 참고. 자손들은 [[정치가]], [[예술가]], [[기업가]], [[학자]]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. 3남 윤광선이 [[남궁억]]의 딸과 결혼하여 그와 사돈 관계가 된다. 증손녀 윤순명은 [[방응모]]의 증손자[* 단 양자인 조카의 손자이므로 친증손자는 아니다.]인 [[방상훈]] 현 [[조선일보]] 대표와 결혼했다. * 3남[* 불확실하지만 윤치왕의 장교자력표에 생모(김정순)의 차남이라 되어있어 [[요절]]한 형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.] [[윤치왕|치왕]](1895. 2. 17. ~ 1982. 12. 21.): [[영국]] [[글래스고 대학교]]를 졸업하여 [[의사]]가 된 뒤 [[군의관]]으로 [[소장(계급)|소장]] 자리에까지 올랐으며, [[대한민국재향군인회]]를 창설했다. 의사이자 의학자로서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, [[세브란스 병원]] 2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. 자손들은 대부분 [[학자]], [[기업가]], [[정치가]]가 되었다. * 4남 [[윤치창|치창]](1899. 3. 5. ~ 1973. 10. 1.): [[시카고 대학교]]에서 유학한 뒤 [[기업가]], [[외교관]] 등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은행([[한국은행]]의 전신) 이사를 맡기도 했다. [[손원일]] 제독의 [[매부|매형]]이다. [[탤런트]] [[남궁원]], 전 외무부 장관 [[김동조(1918)|김동조]]와도 사돈관계가 된다. * 차남 [[윤영렬|영렬]](1854. 4. 15. ~ 1939. 11. 4.): 해당 문서 참고. [[대한제국]] 자헌대부. 형과는 달리 [[경술국치]]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. 만년에는 가난해졌지만 차남 윤치소의 재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. 조카 윤치호는 [[윤치호 일기|그의 일기]]에서 "치소가 아니었다면 삼촌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"(…)이라는 [[패드립]]을 날렸으며, 학식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. 그럼에도 사리분별력과 수완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. 한 명의 본처(한진숙)와 두 첩과의 사이에서 총 9남 5녀를 두었으며, 아래의 아들들은 모두 본처 소생이다. * 장남 치오(1869. 9. 10. ~ 1950. 12. 22.)[* 제대로 보면 눈치채겠지만 아버지 윤영렬하고 나이차이가 고작 '''15년이다'''. 중3 나이에 득남을 한 셈.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윤웅렬이 14년 조금 안되는데(...).]: 계몽운동가, [[친일반민족행위자]]. 자손이 굉장히 많은데, 장남인 [[윤일선]]은 [[의사]]로 [[서울대학교]] 총장 등을 지냈으며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[[의사]]나 [[예술가]]가 되었다. * 차남 [[윤치소|치소]](1871. 8. 25. ~ 1944. 2. 20.): [[정치가]], [[기업가]]. [[이병도]]의 겹사돈이다. 일찍부터 이재(理財)에 밝아 윤영렬이 집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으며,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. 100칸이 넘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도 그가 지은 것이다. 이 사람도 자손이 많다. 장남이 [[대한민국]]의 4대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인 '''[[윤보선]]'''이며, 차남 윤완선의 외증손자가 음악인 [[남궁연]]이고, 삼남 윤원선은 [[흥선 대원군]]의 증손녀와 결혼했다. 5남 윤택선은 자식이 없었던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, 그의 아들 윤창구는 [[KIST]] 교수를 지냈다.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[[정치가]], [[학자]], [[목사]] 등이 되었다. * 3남 [[윤치성|치성]](1875. 4. 7. ~ 1936. 8. 11.): 해당 문서 참고. 이 사람도 자손이 많으며 대부분 [[언론인]], [[기업가]], [[학자]] 등이 되었는데,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(대부분 [[개신교]]였던 이 집안에서) [[조계종]] [[승려]]가 되었다. 여담으로 윤치성은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았고, 군대 해산 이후 구 대한제국군 장교들의 취업을 도와주었다.. 자세한 사항은 [[윤치성]] 문서 참고. * 4남 [[윤치병|치병]](1880. 7. 10. ~ 1940. 1. 24.): 관료였으나 [[경술국치]]가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. * 5남 [[윤치명|치명]](1885. 10. 27. ~ 1944. 4. 21.): 윤치병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[[아산시]]에서 교육자로 살았다. 아들 윤유선은 [[세브란스 병원]] 원장, 국립보건원 원장 등을 지냈다. * 6남 [[윤치영|치영]](1898. 2. 10. ~ 1996. 2. 9.): 해당 문서 참고. 자손들은 주로 [[교수]]가 되었으며, [[KBS]]의 [[윤인구]] [[아나운서]]가 손자다. 인촌 [[김성수(1891)|김성수]]의 사돈이기도 하다. 불과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윤취동의 자손들 중 [[정치가]], [[외교관]], [[법관]], [[의사]], [[학자]], [[기업가]], [[예술가]], [[언론인]] 등으로 출세한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며. 게다가 인척, 사돈 관계를 맺은 사람까지 따지면 대한민국의 웬만한 유명인사와 다 연결될 정도. 여기에는 살짝 야사 삘나는 뒷이야기가 있다. 윤취동의 아버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[[거지]]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,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[[승려]]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. 승려는 이에 보답하고자 [[이순신]]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,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.[* 후에 윤득실 묘는 근처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.] 심지어 그 승려는 만약 들키면 [[오리발|몰랐다고 잡아떼라]]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(…). 그리고 나서는 가세가 다시 서고 자손이 번성하고 출세했다는 것이다. [[파일:yoon_tree.jpg]] 다소 씁쓸하게도, 저 격랑의 시대에 저런 유력 가문이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. 실제로 저 가계도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. 물론 끝끝내 친일을 거부한 윤보선이나 [[독립운동가]]들도 많다. 아버지(윤택영)는 친일파, 아들(윤홍섭)은 독립운동가인 등, 가까운 친척 간에도 한쪽에서는 [[조선귀족]]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한쪽에서는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고 조용히 살기도 했다. 절묘하게도 [[윤치호]] 삼형제는 각각 일본/ 영국/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각각 친일, 친영, 친미파가 되었다. 가공할 분산투자인 셈이다.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, 다른 [[네임드]](?) 친일파 가문인 [[여흥 민씨]](그래도 일부는 독립운동을 했음 대표적으로 [[민필호]], [[민영익]] 일부), [[전주 이씨]]([[왕공족]] 등 일부) 등은 [[조선귀족]] 작위와 일제 은사금으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먹다가 [[8.15 광복|일제의 패망]]과 함께 사이좋게 망한 사람이 많은 반면에, 윤취동의 후손들은 기본적인 경제관념과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가 [[기업가]], [[학자]], [[의사]] 등으로 출세하여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위세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.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더 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. 이는 애초에 가세의 근원이 은사금 등이 아니라 대부분 윤취동 개인이 축적한 부(富)와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. 이를테면 윤치왕의 경우 [[1910년대]]에 사비로 [[영국]] [[유학]]을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뿐더러 유학 시절 1년에 5천원 정도를 썼는데, 이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'''2억 5천만 원'''이 넘는 액수다. (참고로 당시 [[조선총독부]] [[국장(직위)|국장]]급의 월급이 80원 정도였다.) 한 술 더 떠 [[윤보선]]은 [[에든버러 대학교]] 유학 당시 [[피아트]] [[컨버터블]]을 타고 다녔는데, '''내·외국인을 통틀어 [[자가용]]를 가진 유일한 학생'''이었다고 한다. 이렇게 집안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윤치명·윤치병 같은 인물들도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